주산 송도성 ( 主山 宋道性, 1907~1946)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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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진 | 2026-02-06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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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 송도성 ( 主山 宋道性, 1907~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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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 송도성 종사 ( 主山 宋道性, 1907~1946) AI 보정 사진
원기 7년 음력 11월 1일 소태산 대종사 변산에 계실 때 출가시 올리고 출가한 인물이다.
원본코드 : WT1020043-000_298
복원시기 : 원기 111년 2월 9일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원불교대사전]
주요약력
본명은 도열(道悅). 호는 직양(直養). 법호는 주산(主山). 법훈은 종사. 정산종사의 동생이다. 영산지부장겸 교무, 총부교무, 총무부장, 교정원장, 수위단원을 역임했다.

생애와 활동
송도성은 1907년 12월 23일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에서 부친 벽조(久山宋碧照)와 모친 이운외(準陀圓李雲外)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야성(冶城). 조선 명종 때의 명신인 송희규(宋希奎)의 14세손으로, 그의 선조들은 이웃 마을 고산동에서 4백여 년 동안 단일씨족으로 효행과 학문을 빛내며 살아왔다. 그의 일가가 소성동으로 이사한 것은 부모가 결혼한 후 얼마 지나서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품이 총명정직하고 정의감이 투철했으며, 4세 때부터 조부 송훈동으로부터 한학을 익혔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쳐 신동으로 불렸다.

종친인 당시 영남의 거유(巨儒) 송준필(恭山宋浚弼)도 일찍이 문리를 얻은 송도성을 보고 장차 그 대성을 예언한 바 있었다. 친형인 정산은 1918년(원기3) 7월 방언공사가 한창일 때 영산성지로 가서 수위단 중앙단원이 되었다. 이어 부친인 송벽조는 영산성지를 찾아 소태산께 귀의했고, 1919년(원기4) 9월에 전 가족이 영광으로 이사하여 군서면 학정리 신촌에 정착했다가, 1924년(원기9)에 길룡리로 옮겼다. 송도성은 13세에 소태산을 처음 뵙고, 법문을 들은 자리에서 곧 제자되기를 청했다. 이를 기특히 여긴 소태산이 ‘네가 어떻게 그런 마음이 났느냐’고 묻자 송도성은 ‘마음이라는 것은 지극히 넓고 큰 것이니 정신을 수련하여 지극히 큰마음을 확충하는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이어 소태산이 ‘네가 도의 성품을 알았구나. 앞으로 도성(道性)이라 이름하거라’ 하며 법명을 지어주었다. 송도성이 처음으로 집을 떠나 살기는 14세 때 영광으로 이사한 후 반년쯤 지나서였다. ‘도성이 하고 길선이를 한번 바꿔서 가르쳐봅시다’ 하고 어른들 사이에 이야기가 되었고, 두 사람은 그 후 1928년(원기13) 22세시에 결혼했다. 송도성은 1922년(원기7) 16세 때 부안 변산에 주석하며 교법을 초안하던 소태산에게 “마음은 스승님께 바치고 몸은 이 세계에 바쳐서 일원의 법륜을 힘껏 굴려 영겁토록 쉬지 않게 하리라(獻心靈父 許身斯界 常隨法輪 永轉不休)”는 출가시를 바치고 전무출신했다.

석두암에서 여섯 동지와 더불어 소태산을 모시고 낮에는 산전(山田)을 개척하여 생활의 근거를 삼고 밤이 되면 법석에 참석하여 법을 듣고 즐겁게 살았다. 법설내용은 대개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 하는 방법을 설했는데 송도성은 이 법설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1924년(원기9)에는 이리 보광사(普光寺)에서 개최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에 참석한 후, 익산총부건설에 혈성을 다했다. 1925년(원기10) 4월 정수위단 보궐 및 대리조직 시 이순순(二山李旬旬)의 대리로 수위단 감방(坎方)단원이 되었다. 1926년(원기11)에는 서울출장소 초대교무로 파견되어 1년간 서울교화의 기틀을 다졌으며, 1927년(원기12)에는 다시 총부 서무부 서기로 봉직했다.

1928년(원기13)에는 연구부 서기로 전임되어 교단 최초의 월간지인 《월말통신》을 간행했다. 의로움에 찬 붓으로 날카로운 시대감각을 가지고 회중(會衆) 내의 상황보고와 현실에 적절한 소태산의 법설을 기재하여 회원들의 공부방향의 지침서로 삼게 했다. 회원들의 공부 발표와 각지 예회상황을 기록하여 교단사의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1929년(원기14)에는 정식 수위단원이 되었고, 1930년(원기15)에는 교무부장의 중책을 맡아 《월말통신》을 발전시켜 《월보》를 간행했다. 1932년(원기17)에는 영광(영산)지부 교무부장 겸 지부장으로 발령되어 한발과 폭염으로 인한 극심한 재해를 극복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37년(원기22)에는 교정원장에 임명되었고 교무부장과 감찰부장까지 겸하여 교단 발전에 혼신의 정열을 다했다. 1939년(원기24)에는 총부 교감으로 부임하여 이듬해 경진년의 동선(冬禪)에 심혈을 기울여 법풍을 진작시켰다. 교법실현에 앞장서 상시일기와 정기일기며 매일 좌선시간에는 부동의 자세로 진경에 드는 모습을 학인들에게 전수시켰다. 동ㆍ하선의 전후에는 상설학원 체제로 이끌어 학원생에게 교단의 주인정신과 신심을 심어주기 위해 일일이 개인지도에 전념했다. 그때 학원생이었던 제자들 중에는 송도성의 따가운 회초리가 약이 되고 거름이 되어 교단의 중심 인재가 되었다.

1942년(원기27)에는 다시 영광(영산)지부 교감 겸 지부장을 역임했다. 1943년(원기28) 6월 1일 소태산의 열반을 당하여 비통한 가운데 수위단 중앙단원에 피선되어 정산을 보필했다. 1945년(원기30)에는 총무부장에 부임했다. 1945년(원기30)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전재민 구호사업회를 발기해 서울ㆍ익산ㆍ전주ㆍ부산 등지에서 일본ㆍ만주ㆍ중국 등 해외에서 귀환하는 전재동포구호사업(戰災同胞救護事業)을 전개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다했다. 고아원인 보화원을 설립하여 교단 자선사업의 효시를 이루었다. 교단의 지도자였던 송도성은 전재동포구호사업에 몰두하던 중 이재민의 전염병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채, 교단의 중대현안을 의논하기 위해 총부에 내려오다 건강이 악화된 후, 1946년(원기31) 3월 27일 40세를 일기로 소태산의 게송을 암송하면서 열반했다.

작은 키에 위용과 정열에 넘치는 모습, 그리고 따뜻한 인간애를 지닌 송도성은 교단 창업기의 기둥으로서 괄목할만한 역할을 수행했다. 1946년(원기31) 4월 그의 유지를 받들어 발족된 금강청년단(金剛靑年團)은 뒷날 원불교청년회의 모체가 되었다. 특히 청년지도와 후진양성에 열과 성을 다했으며 자신 수행에도 철저했다. 서예와 달마상(達摩像) 그리기에 능했으며 진보주의자로서 패기에 넘친 지도자였다. 또한 그는 각 종교의 경서(經書)에 통달하는 지혜와 신구학문을 이해하는 지식에 이르기까지 걸리고 막히는 바가 없었고, 신문ㆍ잡지ㆍ문학서적을 보고 아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문필에도 능하여 ‘오, 사은이시여’ㆍ‘진경(眞境)’ㆍ‘적멸(寂滅)의 궁전(宮殿)’을 비롯하여 많은 시가(詩歌)와 논설을 남겼다. 1954년(원기39) 4월 제2회 수위단회에서 송도성을 출가위로 추존하고, 1957년(원기42) 종사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 1991년(원기76) 3월 제11회 수위단회에서는 소태산대종사탄생100주년성업봉찬대회를 맞아 송도성의 법위를 ‘대각여래위’로 추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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