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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산 서중안 (秋山 徐中安, 1881~1930)
추산 서중안 (秋山 徐中安, 1881~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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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산 서중안 진영 불법연구회 초대 회장 엮임 총부건설 선구자 원본코드 : WT1050062-026 시창 12년 병인동선 기념 기록사진에서 추출하여 AI복원한 사진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날짜 : 원기 111년 2월 11일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원불교대사전> 주요약력 본명은 상인(相仁). 법호는 추산(秋山). 법훈은 대호법. 1923년(원기8) 입교하여 초대 불법연구회 회장을 역임했고, 중앙총부 건설 사업에 크게 기여했다. 생애와 활동 서중안은 1881년 11월 21일 전북 김제군 진봉면 가실리에서 부친 치욱(致旭)과 모친 반월경화(潘月鏡華)의 11남매 중 넷째 아들로 출생했다. 일찍이 집안에서 조부에게 글을 익히다가 12세 때 비로소 서당에 나갔는데 가세가 빈한하여 형제가 하루씩 번갈아 나무를 하러 다니며 글공부를 했다. 어릴 적부터 타고난 천성이 인후하고 침착했으며 강직하고 세밀했다. 16세에는 근동의 오씨(吳氏)와 결혼했다. 17세에는 향교 출입을 하며 선비들과 문장을 주고받았고, 만경면 향교의 유사(有司)로 추천되었다. 하지만 서중안은 유학에만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다. 당시 자유평등의 진취적 사상의 영향을 받아 향교책임자로 있을 때 반상차별로 죄 없는 사람을 압박하고 착취하던 폐풍을 반대했다. 그리하여 가문에 내려오던 노비문서를 불살라버렸다. 20세부터는 각처의 서당 훈장으로 초빙되었다. 서중안은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의서(醫書)를 탐독하며 연구했고 틈만 있으면 서예와 묵화도 그리며 거문고를 뜯기도 했다. 근동에서는 명필, 명강의로 소문이 자자했다. 28세에는 성덕면장에 추천되어 6년간 근무했는데, 이때 민심이 그를 따랐다. 일제의 압정에서 면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날이 갈수록 가일층 압정을 가하는 일제에게 더 이상 앞잡이 노릇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30세 때에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전북 김제군 만경면 인홍리 사람인 정세월(七陀圓鄭世月)을 부인으로 맞이했다. 35세에 충남 강경읍에 한약방을 열었으나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김제면 교동리에 ‘인화당한약방’을 개설했는데, 명의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고 각처에 신용을 얻어 번창했다. 1923년(원기8)에 친형인 서동풍(春山徐東風)으로부터 소태산대종사의 도덕 말씀을 듣고 원불교에 입교했다. 그 당시 여러모로 보아 김제 사회에서 비교적 명망을 갖추고 부유하게 살던 서중안의 입교는 원불교 창립기의 간고한 시절에 큰 도움이 되었다. 평소에 종교라면 기피해오던 그였지만 자연 중 마음에 감동된 바 있어 친형의 인도로 험로를 찾아들어 부안 변산 봉래정사에서 새 회상 교법을 초안하며 수양중인 소태산을 뵙게 되었다. 소태산을 만난 서중안은 감복하여 그 자리에서 사제지의(師弟之義)를 맺었으며 하룻밤을 지내고 난 뒤에는 그것도 부족하다하여 소태산보다 10여세 연상임에도 불구하고 부자지의(父子之義)로서 결연하여 주기를 간청하며 자기 심신의 일체지도권을 소태산에게 일임했다. 그때부터 얼마 후에 부인 정세월과 함께 봉래정사를 다시 찾은 서중안은 소태산에 간곡히 청했다. “상인(중안)이 사뢰었다. 이곳은 도로가 험난하고 장소가 협착하옵니다. 교통이 편리하고 장소가 광활한 곳을 택하여 도량을 정하시고 여러 사람 전도를 널리 인도하심이 시대의 급무일까 하나이다. 대종사 때가 온 것을 짐작하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에 나가기는 어렵지 아니하나 그대가 그 일을 감당하겠는가. 상인이 사뢰었다. 소자 비록 물질이 많지 않고 정성이 부족하오나 능히 담당하겠나이다. 대종사 드디어 허락하시고 이로부터 정식으로 회상 여실 준비를 시작하시었다”(《대종경선외록》 사제제우장18). 소태산은 서중안의 말에 응하여 장차 정식으로 회상을 열 계획을 함께 의논한 후 그 준비에 착수했다. 소태산으로부터 새 회상 공개에 따른 제반 실무를 하명 받은 서중안은 정산종사를 비롯한 수인의 동지와 더불어 그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924년(원기9) 2월에는 소태산 최초의 상경길에 동행하여 소태산이 머물 임시출장소를 서울 당주동에 자비로 주선했다. 그리하여 한 달 동안 곁에 시봉하며 서울의 박사시화ㆍ성성원ㆍ이동진화ㆍ김삼매화 등 중요인연들을 모으는데 힘을 썼다. 1924년(원기9) 3월에 서울을 떠나 전주로 내려온 소태산은 새 회상 공개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4월 29일 이리 보광사(普光寺)에서 불법연구회창립총회를 열었다. 이날 총회에서 소태산은 불법연구회 총재로 추대되고 초대회장에는 서중안이 선정되었다. 새 회상 공개의 기지를 물색하던 소태산은 8월에 전북 익산시 신룡동 344-2번지를 기지로 확정했다. 익산총부 건설은 서중안ㆍ정세월 부부가 당시 3,495평 기지의 대금 전부와 건축비 일부를 희사한 것이 그 토대가 되었다. 익산본관인 도치원을 건축할 때에 총부 기지 대금은 물론이요 회관 건축비도 상당 부분 희사했다.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그는 회관 건축 당시 김제 약방에서 불이 났다는 전보를 받고도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다 마치지 못했는데 사사(私事)일에 마음이 끌려 중간에 갈 수 없지요”라 했다. 일을 마치고 약방에 돌아와 보니 방 한 칸 남기지 않고 약방은 다 타버렸다. 화재를 위문하는 친지들에게 “불은 이왕에 난 것이고 공사가 더 중하지. 사람은 주인이고 물건은 끝인데 본말이 바꾸지 않는 이상 걱정할 것 없지”라고 말했다. 1924년(원기9) 12월에 완공된 ‘불법연구회’ 본관은 서중안의 글씨로 기둥에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을 걸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서중안은 공도자숭배의 정신에 입각하여 익산 본관 유지대책을 위한 후원기관으로 장차 약업기관을 경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한약방을 내놓을 작정했으나 양자로 들인 조카가 소유권 분쟁을 일으켜 서중안이 40여년 동안 사회적으로 쌓아올린 인망과 공신력을 실추시켰다. 이 일로 여론이 악화되자 소태산은 서중안을 불러 “공도사업은 재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중안의 그 금강같은 오롯한 마음이 더 중한 것이니 약방을 양자인 조카에게 내주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약방을 조카에게 넘겨주었다. 서중안은 46세 되던 1927년(원기12)에는 가산을 정리하고 본교의 사업에 전일하기 위해 총부 구내로 이사했다. 그러나 서중안은 좌절로 인한 발병으로 백방의 치료에도 효과를 보지 못하고 부인 정세월과 은법자(恩法子)인 성정철(誠山成丁哲)에게 살아계신 모친의 후사를 부탁한 후 1930년(원기15) 6월 2일 49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서중안의 열반을 추모하는 글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정산종사는 “익산본관이 터도 없을 때에 추산당은 3천여원이란 거액을 의연하여 기초를 구성했으며 오늘날의 발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추산당은 문필이 출중했나니 《수양연구요론》의 표지(추산당의 친필)만 보아도 아는 일입니다. 추산당은 누구에게든지 겸손했으며 하심(下心)을 주장했습니다”라고 추모했다. 송도성은 감상담에서 “굴기하심(屈己下心)이 네 글자 아무라도 말하기는 쉬우나 행하기는 극히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추산당께서 능히 이것을 실행했습니다.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서로 경어를 사용하자는 의견을 추산당이 제의했습니다. 추산당의 몸은 가시었다 할지라도 그 좋은 법만은 가지 않고 길이 우리의 마음속에 잠겨 있으니 우리 남녀노소가 그 법을 모범하여 서로 굴기하심으로 위주하면 떠나신 영가에게 보답이 되는 동시에 본회의 전도가 양양평화할 것입니다”라고 회고하여 그 인품을 그리고 있다. 서중안은 익산총부 건설의 선구자였고 물질적 후원자였다. 기지대금을 쾌척하여 오늘의 중앙총부가 있게 했고 교단의 크고 작은 일에도 힘 미치는 한 자신의 일로 삼은 대공심가였다. 교단연혁 : https://wonds.kr/chronology/view.php?id=8&page=1&search=%EC%84%9C%EC%A4%91%EC%95%88&limit=10

혜산 전음광(惠山 全飮光, 1909~1960)-대종사 모신 시절의 모습
혜산 전음광(惠山 全飮光, 1909~1960)-대종사 모신 시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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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 전음광(惠山 全飮光1909~1960) 사진설명 : 소태산 대종사, 박허주와 함께 촬영했던 기록 사진을 독사진으로 추출하여 복원한 것으로 남아 있는 사진 중에서 당시 대종사와 함께 있을 시기의 젊은 전음광의 모습이다. 소태산 대종사 열반 당시 장례 과정을 사진 기록으로 남겼다. 원본코드 : WT1030254-000_7 복원기관 : 원불교 기록관리소 복원날짜 : 원기 111년 2월 10일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원불교대사전> 주요약력 본명은 세권(世權). 법호는 혜산(惠山). 법훈은 대봉도. 불법연구회 연구부장, 교무부장, 서무부장, 서정원장, 수위단원을 역임했다. 생애와 활동 전음광은 1909년 6월 17일 전북 진안군 마령면 평지리에서 부친 영규(永奎)와 모친 전삼삼(田參參)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평지리에서 쌀 5백석을 추수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전음광은 성격이 활달했으며 두뇌가 치밀하고 명석하여 매사에 준비함이 철저했다. 일찍이 한문공부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1세 되던 해 16세인 권동화(東陀圓權動華)와 결혼했다. 전음광이 소태산대종사를 처음 뵌 것은 1923년(원기8) 1월 모친을 따라 진안 만덕산에 갔을 때였다. 그 후 전주로 이사하여 전주공립보통학교를 다니던 중 두 번째로 소태산을 뵙게 되었으며, 마음에 느낀 바 있어 학교를 중퇴하고 전무출신이 되어 소태산을 모시고 다니기로 했다. 모친의 연원으로 입교한 전음광은 소태산을 시봉하며 익산총부 건설에 정성을 다해 조력했다. 모친의 소태산에 대한 신심은 마령에서 전주로, 전주에서 다시 익산총부로 이사하기에 이르렀다. 모친은 소태산의 식사를 전담했고 전음광은 회화ㆍ강연ㆍ상시일기ㆍ감각감상ㆍ심신작용처리건을 소태산에게서 직접 지도받았다. 1926년(원기11) 서무부서기로 임명되어 교무사무를 아울러 5년간 근무했다. 그리고 ‘청년단’을 만들어 일반 청년들의 체육ㆍ음악 등 연예지도를 담당했다. 1932년(원기17)부터 3년간은 연구부장과 교무부장을 지냈고 다시 2년간 교무부장을 맡으면서 총부구내에 야학원을 만들어 100여 명의 아동을 교육시키기도 했다. “지금 우리 교세는 미약하다. 그러나 원대한 계획과 이상과 포부는 어디에도 지지 않는다”는 긍지와 신념으로 신성을 키웠다. 소금에 절인 아카시아 밥도 달게 먹었고, 소태산의 교법이 전 세계 인류의 무상묘법임을 확신하며 미래 세상의 정신적 주인이 될 뜻을 확고히 했다. 전음광은 또한 명쾌한 웅변가였다. 엄격한 형식에 매인 종교인이기보다는 활달하며 정이 있고 멋이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소태산과 최초로 은부자(恩父子)의 결의를 맺고 가까이서 시봉을 하며 지도를 받았으며, 소태산의 꾸중과 칭찬을 누구보다도 많이 받으며 인격을 도야했다. 어느 날 회화에서 공부인과 비공부인의 차이점을 감상 발표하여 대중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대종경》 수행품11). 전음광은 교단의 많은 사진을 남긴 카메라맨이기도 했다. 사진사를 직접 집으로 초청하여 1개월간 실지 실습하며, 벽장을 암실로 만들어 필름현상을 할 만큼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뿐 아니라 교단기관지 발행을 외친 시대감각과 비전을 가진 선각자였다. 1929년(원기14) 7월 《월말통신》 제17호에 기고한 ‘회설’에서 “기관지는 그 사회나 단체의 호흡이다. 시대에 적응한 문물과 사조를 때때로 주입하여 잠자는 자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고 게으른 자로 하여금 근면하게 하여 그 사회 그 단체의 생명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관지는 난산한 시대사조를 레일 위로 이끌어 가는 기관차’라고 했다. 《회보》 발행의 필요에 대하여는 본교의 힘줄과 피를 잘 활동하게 하는 촉매체로 보고 있다. 전음광의 열정적인 외침으로 1928년(원기13) 5월에 《월말통신》 창간호가 복사판으로 나왔고, 다시 《월보》, 《회보》로 이름을 달리하여 마침내 《원광》으로 되기까지 전음광의 열과 성이 밑받침이 된 것이다. 전음광은 공익사업에도 눈을 돌렸다. 현대는 공익사업을 전개하는 종교를 요구하고 있음을 알아 《월말통신》 회설을 통해 주장하는 등 교단의 제반문제를 드러내 논리 정연한 문장으로 소태산의 높은 이상과 포부를 대변했다. 어린이 교육을 위한 유아양성소 설치며 유치원 설립, 우리 교법으로 지도할 수 있는 학교 설립, 양로원 개설, 병원 설립, 남자 교역자생활까지 여러 문제와 그 해결방책을 제시했다. 일정(日政)말기 교단이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전음광은 일본 경찰과 접촉하여 침착하고도 능란한 말과 글로 그들을 감화시켰다. 이렇게 전음광은 소태산과 교단을 위해 스스로 고난의 길을 걸어온 공심가였다. 전음광은 광복 이후 교직을 놓고 휴양하다가 1960년(원기45) 7월 21일 52세를 일기로 열반했으며, 장녀 팔근이 전무출신했다. 1985년(원기70) 3월 제103회 수위단회에서는 전음광의 공적을 기려 대봉도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 사상 전음광은 활발한 집필활동을 통해 1928년(원기13)부터 1940년(원기25)까지 12년 동안 《월말통신》, 《월보》, 《회보》의 권두 ‘회설’ 총 95편중 83편을 집필했다. 그중에 몇 편의 회설을 통해 전음광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다. ① 대업을 완성토록 용맹 매진하라:“본회(불법연구회)는 14년의 역사를 가지고 경성, 부안, 영광(영산) 등지에 몇 개의 기초를 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들은 이때에 있어 환희만 할 것도 아니요, 자만할 것도 아니요, 더 한층 용맹매진의 분투력을 발하여야만 창립자인 우리의 떳떳한 의무라 할 것이다.…모든 동지여 서양의 예수는 3년의 전도(傳道)로 동서의 종교계에 패권을 장악했나니 이는 예수의 법을 믿고 활동한 신도들의 악전고투한 결과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종사주(대종사)의 다년간 설법이 계셨고 그 법을 운용할 기관이 대체로 구성이 되었으니 우리의 결심이 굳고 능력이 있다면 우리의 교리와 우리의 사업이 서양인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법을 내심은 종사주(대종사)에게 있고 그 법을 널리 확장할 의무는 우리에게 있나니 우리는 이 의무를 철저히 지켜야 할 것이다”(《월말통신》 제12호). ②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사람의 정신은 하나라 하겠지만 그 정신을 운용하는 방면에 따라서 기술적 정신과 도덕적 정신의 양 방면으로 구분할 수가 있다. 현대 사람들은 모든 물질을 발명하고 제도하는 기술적 정신은 한량없이 개벽되어가고 있으나 그 물질을 구하고 사용하는 도덕적 정신은 아직도 개벽되지 못했으므로 이 구하는 정신과 사용하는 정신을 개벽시키자는 것이다.…현대는 진기한 물질이 발명될수록 그 발달된 기술과 무기를 이용하여 범죄자는 나날이 증가하며 인류생활은 잔혹한 비극을 연출하고 있다. 이것은 그 발명된 물질을 자기의 이욕을 얻고자 하는데 사용하는 까닭으로 그 물질을 사용하는 정신이 개벽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용하는 정신을 개벽시키자는 것은 정당한 교법으로 사람을 교화하여 불의는 죽어도 행치 아니하고 정의는 죽어도 행하는 실행공부를 시켜서 불의한 곳에는 그 물질을 사용치 않게 하고 아무리 어렵더라도 저 사람도 이롭고 나도 이로운 자리이타의 곳에만 그 물질을 사용하도록 정신을 개벽하자는 것이다. 그리한다면 물질문명이 인류생활에 참으로 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韓正釋〉 교단연혁 : https://wonds.kr/chronology/view.php?id=8&page=1&search=&limit=10

주산 송도성 ( 主山 宋道性, 1907~1946)
주산 송도성 ( 主山 宋道性, 1907~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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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 송도성 종사 ( 主山 宋道性, 1907~1946) AI 보정 사진 원기 7년 음력 11월 1일 소태산 대종사 변산에 계실 때 출가시 올리고 출가한 인물이다. 원본코드 : WT1020043-000_298 복원시기 : 원기 111년 2월 9일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원불교대사전] 주요약력 본명은 도열(道悅). 호는 직양(直養). 법호는 주산(主山). 법훈은 종사. 정산종사의 동생이다. 영산지부장겸 교무, 총부교무, 총무부장, 교정원장, 수위단원을 역임했다. 생애와 활동 송도성은 1907년 12월 23일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동에서 부친 벽조(久山宋碧照)와 모친 이운외(準陀圓李雲外)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야성(冶城). 조선 명종 때의 명신인 송희규(宋希奎)의 14세손으로, 그의 선조들은 이웃 마을 고산동에서 4백여 년 동안 단일씨족으로 효행과 학문을 빛내며 살아왔다. 그의 일가가 소성동으로 이사한 것은 부모가 결혼한 후 얼마 지나서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품이 총명정직하고 정의감이 투철했으며, 4세 때부터 조부 송훈동으로부터 한학을 익혔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쳐 신동으로 불렸다. 종친인 당시 영남의 거유(巨儒) 송준필(恭山宋浚弼)도 일찍이 문리를 얻은 송도성을 보고 장차 그 대성을 예언한 바 있었다. 친형인 정산은 1918년(원기3) 7월 방언공사가 한창일 때 영산성지로 가서 수위단 중앙단원이 되었다. 이어 부친인 송벽조는 영산성지를 찾아 소태산께 귀의했고, 1919년(원기4) 9월에 전 가족이 영광으로 이사하여 군서면 학정리 신촌에 정착했다가, 1924년(원기9)에 길룡리로 옮겼다. 송도성은 13세에 소태산을 처음 뵙고, 법문을 들은 자리에서 곧 제자되기를 청했다. 이를 기특히 여긴 소태산이 ‘네가 어떻게 그런 마음이 났느냐’고 묻자 송도성은 ‘마음이라는 것은 지극히 넓고 큰 것이니 정신을 수련하여 지극히 큰마음을 확충하는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이어 소태산이 ‘네가 도의 성품을 알았구나. 앞으로 도성(道性)이라 이름하거라’ 하며 법명을 지어주었다. 송도성이 처음으로 집을 떠나 살기는 14세 때 영광으로 이사한 후 반년쯤 지나서였다. ‘도성이 하고 길선이를 한번 바꿔서 가르쳐봅시다’ 하고 어른들 사이에 이야기가 되었고, 두 사람은 그 후 1928년(원기13) 22세시에 결혼했다. 송도성은 1922년(원기7) 16세 때 부안 변산에 주석하며 교법을 초안하던 소태산에게 “마음은 스승님께 바치고 몸은 이 세계에 바쳐서 일원의 법륜을 힘껏 굴려 영겁토록 쉬지 않게 하리라(獻心靈父 許身斯界 常隨法輪 永轉不休)”는 출가시를 바치고 전무출신했다. 석두암에서 여섯 동지와 더불어 소태산을 모시고 낮에는 산전(山田)을 개척하여 생활의 근거를 삼고 밤이 되면 법석에 참석하여 법을 듣고 즐겁게 살았다. 법설내용은 대개 관심입정(觀心入定)과 견성성불(見性成佛) 하는 방법을 설했는데 송도성은 이 법설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1924년(원기9)에는 이리 보광사(普光寺)에서 개최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에 참석한 후, 익산총부건설에 혈성을 다했다. 1925년(원기10) 4월 정수위단 보궐 및 대리조직 시 이순순(二山李旬旬)의 대리로 수위단 감방(坎方)단원이 되었다. 1926년(원기11)에는 서울출장소 초대교무로 파견되어 1년간 서울교화의 기틀을 다졌으며, 1927년(원기12)에는 다시 총부 서무부 서기로 봉직했다. 1928년(원기13)에는 연구부 서기로 전임되어 교단 최초의 월간지인 《월말통신》을 간행했다. 의로움에 찬 붓으로 날카로운 시대감각을 가지고 회중(會衆) 내의 상황보고와 현실에 적절한 소태산의 법설을 기재하여 회원들의 공부방향의 지침서로 삼게 했다. 회원들의 공부 발표와 각지 예회상황을 기록하여 교단사의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1929년(원기14)에는 정식 수위단원이 되었고, 1930년(원기15)에는 교무부장의 중책을 맡아 《월말통신》을 발전시켜 《월보》를 간행했다. 1932년(원기17)에는 영광(영산)지부 교무부장 겸 지부장으로 발령되어 한발과 폭염으로 인한 극심한 재해를 극복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37년(원기22)에는 교정원장에 임명되었고 교무부장과 감찰부장까지 겸하여 교단 발전에 혼신의 정열을 다했다. 1939년(원기24)에는 총부 교감으로 부임하여 이듬해 경진년의 동선(冬禪)에 심혈을 기울여 법풍을 진작시켰다. 교법실현에 앞장서 상시일기와 정기일기며 매일 좌선시간에는 부동의 자세로 진경에 드는 모습을 학인들에게 전수시켰다. 동ㆍ하선의 전후에는 상설학원 체제로 이끌어 학원생에게 교단의 주인정신과 신심을 심어주기 위해 일일이 개인지도에 전념했다. 그때 학원생이었던 제자들 중에는 송도성의 따가운 회초리가 약이 되고 거름이 되어 교단의 중심 인재가 되었다. 1942년(원기27)에는 다시 영광(영산)지부 교감 겸 지부장을 역임했다. 1943년(원기28) 6월 1일 소태산의 열반을 당하여 비통한 가운데 수위단 중앙단원에 피선되어 정산을 보필했다. 1945년(원기30)에는 총무부장에 부임했다. 1945년(원기30)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전재민 구호사업회를 발기해 서울ㆍ익산ㆍ전주ㆍ부산 등지에서 일본ㆍ만주ㆍ중국 등 해외에서 귀환하는 전재동포구호사업(戰災同胞救護事業)을 전개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다했다. 고아원인 보화원을 설립하여 교단 자선사업의 효시를 이루었다. 교단의 지도자였던 송도성은 전재동포구호사업에 몰두하던 중 이재민의 전염병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채, 교단의 중대현안을 의논하기 위해 총부에 내려오다 건강이 악화된 후, 1946년(원기31) 3월 27일 40세를 일기로 소태산의 게송을 암송하면서 열반했다. 작은 키에 위용과 정열에 넘치는 모습, 그리고 따뜻한 인간애를 지닌 송도성은 교단 창업기의 기둥으로서 괄목할만한 역할을 수행했다. 1946년(원기31) 4월 그의 유지를 받들어 발족된 금강청년단(金剛靑年團)은 뒷날 원불교청년회의 모체가 되었다. 특히 청년지도와 후진양성에 열과 성을 다했으며 자신 수행에도 철저했다. 서예와 달마상(達摩像) 그리기에 능했으며 진보주의자로서 패기에 넘친 지도자였다. 또한 그는 각 종교의 경서(經書)에 통달하는 지혜와 신구학문을 이해하는 지식에 이르기까지 걸리고 막히는 바가 없었고, 신문ㆍ잡지ㆍ문학서적을 보고 아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문필에도 능하여 ‘오, 사은이시여’ㆍ‘진경(眞境)’ㆍ‘적멸(寂滅)의 궁전(宮殿)’을 비롯하여 많은 시가(詩歌)와 논설을 남겼다. 1954년(원기39) 4월 제2회 수위단회에서 송도성을 출가위로 추존하고, 1957년(원기42) 종사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 1991년(원기76) 3월 제11회 수위단회에서는 소태산대종사탄생100주년성업봉찬대회를 맞아 송도성의 법위를 ‘대각여래위’로 추존했다.

대종사 최초 일원상 그린 장소
대종사 최초 일원상 그린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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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 4년(1919) 소태산 대종사 최초로 일원상을 그려보인 곳 관련기록 : https://wonds.kr/chronology/view.php?id=4 장소 : 김제 금산사 송대 원본사진 : 교정원 문하사회부 성적지 조사사진-나무에 가려 복잡하고 저해상도 미등록 사진. 복원사진 : 원기 87년 건물 복원 전 촬영된 사진을 기록관리소에서 AI 이미지 복원. 복원날짜 : 원기 111년 1월 30일 복원기관 : 원불교 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만덕산 초선지 옛 모습
만덕산 초선지 옛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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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산 초선지 (옛 만덕암 터) 원본코드 : W1001208P0552 185_만덕산 김씨 산제당 터(만덕암) 복원날짜 : 원기 111년 1월 26일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복원설명 : 소태산 대종사 탄생 100주년 기념 사진 간행물에 실려있는 흐믜한 사진으로 AI복원한 사진으로 원불교 최초의 선을 났던 장소로 건물은 사라지고 없던 때 촬영 된 것으로 현재로선 가장 오래 된 사진이다. 만덕산 초선지 : 만덕산 초선지는 좌포에 사는 김 승지(乘志)가 1910년경에 부종병으로 고생하는 며느리 이현공을 위해 지어 준 3칸 기와집이 있던 곳으로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만덕암에서 3개월을 적공하였고, 원기 9년에는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후 12명의 제자와 한 달 동안 선(禪)을 났다. <2009,원불교기초이해> 만덕산성지 : 만덕산성지(萬德山聖地)는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만덕산 남쪽 기슭 8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원불교가 만덕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원기 6년 변산 봉래정사에서 정산종사가 소태산 대종사에게 “어디든지 네 발 걸음 내키는 대로 가 보아라”는 말씀을 받들고 길을 가던 중 만덕산 북쪽에 위치한 미륵사 주지를 만나 미륵사에서 겨울 한 철을 지내면서 부터다. 정산종사가 미륵사에서 화주인 최도화를 만난 후 정산종사가 미륵사를 떠나고 없자, 최도화는 정산종사를 찾아 봉래정사까지 왔다가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소태산 대종사는 만덕산 만덕암에서 최도화의 주선으로 원기 7년 말부터 3개월을 머물며 적공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 9년 ‘불법연구회’ 창립총회 후 만덕산을 다시 찾아 몇몇 제자와 선(禪)을 나자, 최도화의 인도로 만덕산 아래 좌포에 사는 노덕송옥이 11살 된 장손자인 김대거(대산종사)를 데리고 귀의하였고, 서울에서 제자가 된 이동진화는 김삼매화와 함께 찾아왔다. 그리하여 경상도 성주의 송규(정산종사)와 영광의 오창건·김광선, 진안의 최도화·노덕송옥·김대거, 전주의 전삼삼·전음광·이청춘, 서울의 박사시화·이동진화·김삼매화 등 12명의 제자와 원기 9년 (음) 5월 한 달 동안 김광선의 주관으로 선(禪)을 났다. 이를 일러 원불교에서는 만덕산 초선회(初禪會)라 한다. 만덕산 만덕암은 소태산 대종사 → 정산종사 → 대산종사로 이어지는 원불교의 3대 주법(主法)이 최초로 만난 역사적인 곳이다.<2009,원불교기초이해>

칠산 유건 (七山 劉巾, 1880~1963)
칠산 유건 (七山 劉巾, 1880~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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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산 유건 종사 (七山 劉巾, 1880~1963) 원본코드 : WT1030251-000_031-2 복원날짜 : 원기 111년 1월 23일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설명 : 스캔 사진을 AI를 활용하여 납자를 뺀 반신 사진으로 상반신 확장 복원한 사진이다. 인물설명 : 소태산 대종사의 최초 9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칠산 유건(七山 劉巾) 대호법은 1880년 11월 11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유호일(劉浩一) 선생과 모친 이씨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칠산 대호법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강직하였으며 지혜와 용단력이 출중하였다. 일찍이 동학(東學)에 입문하여 득도묘술(得道妙術)에만 발원하다가 결국 그것이 실없음을 깨닫고 32세 때에 그만 두었다. 소태산 대종사 깨달음을 이루자 소태산 대종사보다 11세나 연상이요, 외숙임에도 불구하고 칠산 대호법은 소태산 대종사의 덕화에 감동하고 대도회상 창립취지에 찬동하여 제자 될 것을 서원하고 생질(甥姪)되는 소태산 대종사께 귀의하여 사제지의를 맺었다. 처음에는 생질 되는 소태산 대종사를 ‘스승님’이라고 부르기가 어색하기도 하였지만 차차 신성이 깊어감에 따라 추호의 계교심 없이 독실한 신성으로 받들었다. 칠산 대호법은 소태산 대종사 앞에 앉을 때에는 반드시 무릎을 꿇고 앉았으며, 꼭 ‘종사님’이라 불렀다. 혹 주위 사람들이 묻기를 “생질을 스승님으로 모시기가 어색하지 않느냐?”고 하면 “육신은 생질이지만 법은 지존(至尊)의 스승님이시다”고 하여 조그마한 일이라도 제자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칠산 대호법은 원기 2년 (음) 7월 최초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 때에 곤방(坤方)단원으로 저축조합, 방언공사, 법인기도 등 새 회상 창립에 공헌하였다. 법인성사를 이룬 후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 받은 법명이 건(巾), 법호는 칠산(七山)이며 본명은 성국(成國)이다. 칠산 대호법은 키가 크고 기상이 당당하며 특히 기력이 장하여 방언공사 때에는 힘든 일을 도맡아 하였고, 법인기도 때에도 가장 멀고 험한 기도봉을 다녔다. 원기 4년 (음) 3월 방언공사를 마친 후 준공기념비를 건립하려 했으나 돈이 없어 칠산 대호법의 발의로 자연석에 시멘트 판을 만들어 거기에다 소태산 대종사와 8인 단원의 이름과 공사의 시작과 마침을 새겼다. 새 회상 최초의 금석(金石) 기념물인 정관평(貞觀坪) 준공기념비 속칭 ‘방언조합 제명바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제명바위는 정관평 방언답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옥녀봉 동쪽 중턱에 위치해 있다. 가히 맨주먹으로 바다를 막아 그 거창한 사업을 이뤄놓은 조합원들 중 한 사람이 “우리가 이 거창한 사업을 끝냈으니 그 기념으로 비석이나 하나 세워두자”는 의견을 내었고, 조합원 전원이 일제히 찬성, 소태산 대종사께 진언하여 허락을 얻었다. 그러나 비석을 세울 여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칠산 대호법이 “저 바위에 양회(洋灰, 시멘트)를 바르고 거기에 제명을 해두면 백년은 갈 것 아니냐?”는 의견에 모두 찬성하여 그래서 제명바위가 만들어졌다. 방언공사와 법인기도를 마친 후 칠산 대호법은 전무출신의 길에 나서지 않고 영광 사가(소태산 대종사 탄생가)에 계속 머물면서 가사에 주력하며 거진출진(居塵出塵)으로서 새 회상 발전에 조력하며 32년간을 지냈다. 원기 42년 78세시에는 후진들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여 총부 옆 중앙수양원으로 와 만년 수양에 힘쓰다가 원기 48년 2월 22일, 83세로 9인 선진 가운데 마지막으로 열반하였다. 칠산 대호법이 열반하자 대산종사는 칠산 대호법의 심법상 위대한 점을 말했다. 첫째, 사가로 돌아간 후 아들이 병으로 누워있어 생활이 극도로 곤궁하였으나 땔나무하러 산에 다닐 때 남들은 다 교중(敎中) 산에서 나무를 베고 야단이지마는 칠산 대호법은 손자를 데리고 교중 산을 넘어 10리, 20리 다니며 땔나무 한 점이요. 둘째, 9인 선진이었으나 후진에게도 법으로 대하여 조금도 9인 선진 가운데 한 분이라는 상(相)이 없었던 점이요. 셋째, 영산 재 방언공사 때 품팔이와 땅 떼기를 하므로 “일은 그만 두고 감독만 하시더라도 노임을 드리겠으니 그리하시라”고 해도 “과거에 칠산이지, 지금도 칠산이냐”고 하면서 일체를 마다하고 그대로 손자와 땅 떼기 한 점 등이다. 그 어른의 회상을 위하는 마음과 심법이 이와 같았다.<2009.원불교기초이해>

육산 박동국 (六山 朴東局,1897~1950)
육산 박동국 (六山 朴東局,1897~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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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산 박동국 종사 원보코드 : W1000120I0081 복원시기 : 원기 111년 1월 23일 복원기관 : 원불교 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복원설명 : 원기 47년도 원불교역대사진첩 간행물에 실린 얼굴사진을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복원하였다. 인물정보 : 소태산 대종사 구인제자 중 한사람 후천개벽의 주세불이신 소태산 대종사의 친아우로서 최초 9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동참했던 육산 박동국(六山 朴東局) 대호법은 1897년 1월 18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회산 박회경(晦山 朴晦傾) 대희사와 모친 정타원 유정천(定陀圓 劉定天) 대희사의 4남 2녀 중 사남으로 태어났다. 육산 대호법은 일찍이 한문사숙에서 수학하였으며, 당숙(堂叔)인 세규(世圭)에게 양자로 가서 가사에 조력하던 중 형이 깨달음을 얻자 제자가 되었다. 육산 대호법은 천성이 강직하였으며 기품이 호협하고 용모는 형인 소태산 대종사와 닮았다. 원기 2년 (음) 7월 최초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 때에 이방(離方)단원으로 임명되어 저축조합운동, 방언공사, 법인기도 등에 동참하였다. 원기 4년 법인성사를 이룬 후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 받은 법명이 동국(東局), 법호는 육산(六山)이며 본명은 한석(漢碩)이다. 법인기도를 마친 후에도 육산 대호법은 정신·육신·물질로 대도회상 창립에 힘껏 노력하였고 영광읍 연성리에 살며 가정 사정으로 인하여 전무출신을 하지 못했다. 육산 대호법은 비록 재가에 머물러 지냈지만 양자로 간 상황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대신하여 모친을 직접 시봉했으며, 모친의 환후 중에는 형인 소태산 대종사를 대신하여 시탕함으로써 소태산 대종사가 안심하고 새 회상 창건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여 공사에 큰 도움을 주었다. 모친 시탕과 관련된 법문이 〈대종경〉 인도품 49장이 되었다. 대종사 봉래정사에서 모친 환후의 소식을 들으시고 급거히 영광 본가에 가시사 시탕하시다가 아우 동국에게 이르시기를 “도덕을 밝힌다는 나로서 모친의 병환을 어찌 불고하리요마는, 나의 현재 사정이 시탕을 마음껏 하지 못하게 된 것은 너도 아는바와 같이 나를 따라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이 벌써 많은 수에 이르러 나 한 사람이 돌보지 아니하면 그들의 전도에 지장이 있을 것이요, 이제까지 하여 온 모든 사업도 큰 지장이 많을 것이니, 너는 나를 대신하여 모친 시탕을 정성껏 하라, 그러하면 나도 불효의 허물을 만일이라도 벗을 수 있을 것이요, 너도 이 사업에 큰 창립주가 될 것이다”하시고, 또한 모친에게 위로하시기를 “인간의 생사는 다 천명(天命)이 있는 것이오니 모친께서는 안심하시고 항상 일심 청정의 진경에 주하시옵소서”하시고 강연히 그곳을 떠나 정사로 돌아오시어 제도사업에 전심하시니라. 육산 대호법은 그 후 계속하여 가사에 종사하다가 한국전쟁 때인 원기 35년 10월 4일, 54세로 영산에서 열반하였다.<2009,원불교기초이해>

정산 송규(鼎山 宋奎, 1900~1962)
정산 송규(鼎山 宋奎, 1900~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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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송규 종사 (鼎山 宋奎, 1900~1962) 복원날짜 : 원기 111년 1월 22일 복원기관 : 원불교 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원본사진 : 정확한 날짜기록은 없으나 원기 28년 대종사 열반 전 후로 여겨진다. 생산설명 : 원본사진을 AI 활용하여 복원한 사진으로 사실연구에는 활용할 수 없습니다. 정산종사 십상 ① 하늘을 우러러 기원하신 앙천기원상(仰天祈願相) 큰 뜻을 품으시고 가야산으로 출발하실 즈음에 시 한수를 읊으시니 ‘해붕천리고상우(海鵬千里翶翔羽) 농학십년칩울신(籠鶴十年蟄鬱身) 바다붕새 천리나 되는 나래 가지고도 조롱 속에 10년이나 갇힌 학과 같이 답답하구나.’ 이 글을 장인 여병규가 보고 “아마도 자네는 나가서 큰 일 할 사람이지 집안 살림은 못 하겠네”하였다. ② 스승을 찾아 뜻을 이루신 심사해원상(尋師解願相) 가야산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시고 전라도로 행하시어 문득 대원사에 이르러서 진묵대사와 증산천사 등 전성(前聖)들의 법연을 갖던 중 우연히 화해리 해운 여 노인(女老人)의 알선으로 수삼 개월 화해리에서 지내시다가 대종사를 만나시었다. ③ 중앙으로 법을 이으신 중앙계법상(中央繼法相) 대종사 숙겁의 법연을 맞이하기 위하여 3년을 기다리시며 중앙을 비워놓았다가 정산종사를 앉히시고 ‘아심여심(我心汝心) 여심아심(汝心我心)이며 이젠 우리 회상의 일은 끝났다’하시고 만대 정법을 논의하시었다. ④ 봉래에서 교법제정을 도우신 봉래조법상(蓬萊助法相) 월명암에서 봉래정사를 왕래하시면서 제법하시는 대종사를 도와드리는 상수(上首)역할을 하시었다. ⑤ 초기교단의 교화인연을 맺어주신 초도교화상(初度敎化相) 익산총부를 건설하기 위하여 만덕산에 보내주신 대종사의 성지를 대행하시었다.(교단 교화 만대의 초선지를 정하심) ⑥ 개벽시대 주세불의 법을 이으신 개벽계성상(開闢繼聖相) 종법사위에 오르셔서 대종사를 새 세상의 주세불로 높이 받들며 불불계세(佛佛繼世) 성성상전(聖聖相傳) 심심상연(心心相連) 법법상법(法法相法)의 대임을 맡으시어 한 게(偈)를 읊으시니 ‘유위위무위(有爲爲無爲) 무상상고전(無相相固全) 망아진아현(忘我眞我現) 위공반자성(爲公反自成) 함 없음에 근원하여 함 있음을 이루게 되고, 상없는 자리에서 오롯한 상을 얻게 되며, 나를 잊은 자리에서 참된 나를 나타내고, 공을 위하는 데서 도리어 자기를 이루시니라.’(〈정산종사법어〉 무본편 33장) ⑦ 전란 중에도 교단을 쉼 없이 이끌어 주신 전란불휴상(戰亂不休相) 8.15 혼란과 한국전쟁을 당하여 재가출가 전 교도가 희생자 없이 무사히 회상을 이끌어 나오시었다. ⑧ 교서를 정비하신 교서정비상(敎書整備相) 회상성업을 계승하시는 가운데 7대교서 중 대종경과 6대교서 전반을 친감(親鑑)하시어 교단 만대의 전 교서를 정비하시고 교단 3대 사업인 교화·교육·자선기관을 설립하는 동시에 그 기초를 확립시켜 주시었다. ⑨ 9년 동안의 큰 병환 중에도 자비로 제중하신 치병제중상(治病濟衆相) 9년 대병(大病)의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겪으시면서도 대종사의 일원대도를 시방세계에 전력하시려는 원력은 더욱 크시고 그 정성과 적공은 주소 일념뿐이시니 마음 한번 가라앉고 이마 한번 찡그리신 바 없으시어 그 성자(聖姿)와 그 성심(聖心)의 거룩하심에 만인이 흠망한 바가 크시었다. ⑩ 임인년에 열반하신 임인열반상(壬寅涅槃相) 열반하시기 직전에 게송을 전해주시니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 터 한 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는 인류의 대 윤리를 제창하시었다. 결어(結語) 송규는 정규의 지량으로 능히 측량할 사람이 아니로다. 내가 송규 형제를 만난 후 그들로 인하여 크게 걱정하여 본 일이 없었고 무슨 일이나 내가 시켜서 아니한 일과 두 번 시켜본 일이 없나니라.(〈대종경〉 신성품 18장) ※ 정산종사 십상은 《대산종사법어(자문판)》제2부 법어 제1 신심편 45장과 대산종사 종법사 재위 중 정산종사 십상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주신 내용을 정리하였다.<2009,원불교기초이해>

오산 박세철 (五山 朴世喆,1879-1926)
오산 박세철 (五山 朴世喆,1879-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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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 오산 박세철 종사 (五山 朴世喆,1879-1926) 복원날짜 : 원기110년 12월 31일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사진용도 : 본 사진은 복원한 것으로 교화 활용 목적이며 인물 연구용으로는 활용할 수 없습니다. 인물정보 : 소태산 대종사의 최초 9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 오산 박세철(五山 朴世喆) 대봉도는 1879년 1월 16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에서 부친 박다여(朴多汝) 선생과 모친 노(盧)씨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에 당숙(堂叔)인 군서(君瑞)에게 양자로 간 후 농업에 종사하며 가정을 돌보던 중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이루자, 칠산 유건의 인도로 집안 아저씨 되는 소태산 대종사를 찾아와 사제지의를 맺고 원기 2년 (음) 7월 최초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 때에 손방(巽方)단원으로 임명 되었다. 원기 3년 방언공사가 시작되자, 오산 대봉도는 매양 선두에서 심혈을 다해 일하면서도 공은 언제나 타인에게 양보하였기 때문에 그의 주위에는 언제나 덕화의 기운이 연하였고,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가 항상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종전에 병으로 신음하던 몸이 약을 쓰지 않고 완치가 되어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오산 대봉도는 원기 4년 소태산 대종사의 지도로 8인 단원과 더불어 창생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였고, 마침내 생명희생의 대 서원을 올림으로써 천지신명이 감응하여 백지혈인을 나투었다. 이때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 받은 법명이 세철(世喆), 법호가 오산(五山)이며 본명은 경문(京文)이다. 원기 4년 겨울 오산 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의 변산 행가 시 배종할 때 험한 산길에 고생이 심했으나 소태산 대종사를 모시는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그 후 오산 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의 명에 의하여 영산으로 돌아와 옥녀봉 아래 구간도실의 수호책임을 맡아 정성을 다하였으며, 원기 6년 43세시에는 수년간 다소 저축하였던 금액 전부를 본교 기성조합에 희사하였다. 원기 10년 47세 되던 2월에는 우연히 내종병(內腫病)에 걸려 크게 위경을 맞았으나 양의(良醫)의 치료로 차효가 있음에 출가하기 좋은 시기라 생각하고 익산총부로 나와 전무출신 하였다. 원기 11년 소태산 대종사 사가가 전라북도 임실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이때 오산 대봉도는 팔산 김광선과 함께 가사 전반을 돌봐 주기도 하였으나 그해 6월부터 다시 전일의 병이 재발하여 그곳에서 한 달 가까이 신음하다가 7월에는 부득이 영산 자택으로 귀가하여 백방으로 치료에 노력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점점 병이 깊어졌다. 오산 대봉도는 자신의 병세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하고 자녀 손들을 불러 앉히고는 “나의 심신은 공중에 바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너희는 나를 사가 사람으로 알지 말고 사후에도 교중의 지시를 받아 초상절차도 신정예법에 의하여 집행하여 주기 바란다”고 유언하였다. 또한 임종을 지켜보는 정산종사와 삼산 김기천의 손을 꼭 잡고 비창(悲愴)한 어조로 “불초제(不肖弟)는 스승님과 형님들을 길이 모시지 못하고 먼저 가게 되어 죄송하옵니다. 형님들께서는 부디 오래 사시어 공부사업을 잘 하시와 인도정의의 기초를 확립하시고 세계문명의 선구자가 되어 주시며, 불초제의 앞길을 선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최후를 부탁한 후 최초의 9인 제자 중 가장 먼저 원기 11년 9월 6일, 48세로 열반하였다. 오산 대봉도는 9인 제자 가운데 키가 제일 작았으며, 체질이 약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 큰 힘을 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천성이 선량하고 겸양하여 무슨 일이나 하기 어려운 일은 스스로 담당하는 특성을 가졌다. 오산 대봉도는 언제나 남이 하기 어려운 일을 앞장서고 도맡아서 스스로 한 일에 대해 조금도 장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 무상도인 이었다. 방언공사 때에는 9인 제자 가운데 40세로 최고 연장자였으나 건강이 약하고 힘이 부족해 직접 흙짐을 짊어지기가 어려우므로 밥 심부름, 물 심부름을 비롯, 모든 잔심부름을 연하인 동지가 시키더라도 조금도 싫어하지 않고 그것이 방언공사 하는데 자신의 소임으로 알고했다. 당시 외부 인사들은 소태산 대종사의 9인 제자 중 오산 대봉도가 인물이나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 제일 뒤떨어졌다고 평했다.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는 그의 위대한 천품과 훌륭한 특징을 인정하여 오산 대봉도를 “어느 국왕이나 유명한 재상과도 바꾸지 않으며 조선총독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 밖으로 나타난 외모야 당연히 저 조선총독보다 못하지만 안으로 상없는 마음과 그 희생적 보살행은 조선총독과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가한 것이다.<2009,원불교기초이해>

이산 이순순 (二山 李旬旬, 1879-1941)
이산 이순순 (二山 李旬旬, 1879-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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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 이순순 종사 (二山 李旬旬, 1879-1941) 복원연도 : 원기 111년(2026) 1월 15일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생산설명 : 인공지능으로 복원한 사진으로 교화 참고 자료용으로 활용할 수 있으나 사실 고증에는 사용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인물설명 : 소태산 대종사의 첫 9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산 이순순(二山 李旬旬) 대호법은 1879년 9월 1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천정리에서 부친 이다익(李多益) 선생과 모친 김씨의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천성이 호걸다워 호탕하게 놀기를 좋아하는 성격을 가진 일면 온순 다정하기도 하였다. 키가 크고 기상이 늠름하며 성격이 활발하였던 이산 대호법은 창업기 교단에서 인화(人和)의 표본이 되었다. 이산 대호법은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이루기 전부터 이미 교분이 있었다. 32세 되던 해는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기 6년 전이었다. 이산 대호법은 이웃 마을에 살며 소태산 대종사의 외숙인 칠산 유건과의 친분으로 소태산 대종사가 세상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 생활의 곤궁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산 대호법은 소태산 대종사께 민어 파시(波市)로 유명한 신안군 탈이섬으로 장사 떠날 것을 권하였다. 탈이섬은 법성포 앞바다인 칠산바다를 지나 남쪽에 위치한 임자도 곁에 붙어 있는 조그만 섬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구호동 가족들과 상의를 하고 이산 대호법에게 보리 석 섬을 빌려 장사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며칠 만에 다녀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달이 걸리는 장삿길 이었다. 그리하여 장사를 위해 배꾼들에게 필요한 물자며 그 동안 먹고 잘 살림도구도 장만하였다. 일행은 소태산 대종사와 이산 대호법, 칠산 유건, 그리고 밥을 해 주고 살림을 돌봐줄 사타원 이원화가 함께 갔다. 소태산 대종사는 탈이섬에서 뱃사람들에게 식량 등 물자를 대주고 잡아온 고기와 교환하여 판매하는 장사를 시작하였다. 희한하게도 어찌된 일인지 소태산 대종사에게서 양식과 물자를 가지고 바다로 나간 고깃배는 모두 다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고 고기를 가득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 이와 같이 석 달 정도 장사를 해 돈을 상당히 많이 벌었다. 그리하여 소태산 대종사는 부친이 남긴 부채를 청산하고 다시금 구도에 정진할 수 있었다. 소태산 대종사 깨달음을 얻기 전, 입정 당시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노루목 초가집이 지붕나래가 걷어져 방에 비가 새어 소태산 대종사의 온 몸이 흠뻑 적셔지는 사태가 발생 하였어도 아무것도 모르고 입정에 들어 있을 때 이산 대호법이 노루목으로 달려가 지붕나래를 고쳐 주었다. 이와 같이 교분을 갖고 내왕하던 이산 대호법은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자 같은 마을 삼산 김기천의 인도로 12살이나 연하인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었다. 이산 대호법은 원기 2년 (음) 7월 26일 교단의 최초 통치단인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 때에 감방(坎方)단원으로 임명되어 허례폐지와 미신타파, 금주단연 등으로 저축조합의 자금조성에 심혈을 다하였다. 원기 3년 (음) 4월 간석지 방언공사가 시작 되었을 때 이산 대호법은 동지들과 함께 흙짐을 저 나르고 삽질을 하는 등 온갖 어려운 일을 하면서도 일호의 사심 없이 모든 난관을 감수하며 정성을 다 바쳤다. 또한 이산 대호법은 원기 4년 (음) 3월 26일부터 소태산 대종사의 지도를 받으며 단원들과 함께 창생을 구원할 새 회상 창립을 위하여 혈심으로 기도하였고 마침내 사무여한의 대 서원을 올림으로써 천지신명의 감응을 얻어 백지혈인을 나투었다. 이때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세계 공명으로 봉수 받은 법명이 순순(旬旬), 법호는 이산(二山)이며 본명은 인명(仁明)이다. 그 후 이산 대호법은 전무출신을 단행하지는 못했으나 거진출진으로 회상의 발전에 협력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총부에서 영산에 내려갔다가 이산 대호법에게 정정(定靜)을 얻는 외정정과 내정정의 두 가지 길과 관련해 재가공부(在家工夫)하는 법을 지도하였다. 재가로서 영광 천정리에서 생활하면서 교단발전에 정성을 다하던 이산 대호법은 소태산 대종사가 원기 28년에 열반하자 총부로 달려와 스승을 잃은 슬픔을 함께 나누고 최초 9인 제자 중 생존해 있는 동지들과 기념촬영을 하였다. 이산 대호법은 원기 30년 11월 28일, 67세로 영광 천정리 자택에서 열반하였다. <2009,원불교기초이해>

팔산 김광선 (八山 金光旋,1879~1939)
팔산 김광선 (八山 金光旋,1879~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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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산 김광선 종사 (八山 金光旋,1879~1939) 복원연도 : 원기 111년(2026)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원본코드 : WT1020007-000_041 인물설명 : 소태산 대종사의 구인제자 중 한사람 소태산 대종사의 첫 제자이며 최초 9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팔산 김광선(八山 金光旋) 대봉도는 1879년 9월 6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에서 부친 김응오(金應五) 선생과 모친 강씨(姜氏)의 3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숙부 응칠(應七)에게 양자로가 양모인 조연풍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팔산 대봉도는 10세 때부터 한문사숙하고, 17세 때에는 길룡리 와탄천 건너 마촌(馬村) 산중에 들어가 천막을 치고 주문과 심축을 드리며 1년 동안 음양복술 공부를 하였다. 18세부터 가계를 돕기 위하여 농사도 짓고 혹은 상업도 경영하였으며, 31세부터 3년간은 광산 김씨(光山 金氏) 문중의 대동보를 꾸미었다. 팔산 대봉도는 세상 모르고 입정삼매에 있는 소태산 대종사의 지극히 간구한 생활을 보고 우연히 남다른 동정심이 발하여 가끔 찾아가 식사도 제공하는 등 물질적 살림을 보조하였다. 또한 공부하는 비용을 후원하여 고창 연화봉 등을 동반하며 공부하기도 하였다. 팔산 대봉도가 38세 되던 해에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어 그 동안 피골상접(皮骨相接)하던 몸이 다시 혈육 충만하고 용모의 모습이 일월같이 명랑 원만해 지는 것을 접하고 심중에 깊이 감동되었다. 그리하여 호형호제(呼兄呼弟)하던 12살 아래 소태산 대종사의 첫 제자가 되었다. 팔산 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와 사제지의를 맺은 이후로는 수도생활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세상사를 청산하기 위하여 채무자에게 수금할 3천여 원의 채권증서를 스스로 모두 소각해 버린 후 빌려준 돈도 전부 탕감해 주어 놀라게 하였다. 또한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은 후 종종 허물없는 팔산 대봉도를 불러 ‘붓을 잡으라’ 명하여 친히 문구(文句)와 시가(詩歌) 등을 불러주며 수필편집(受筆編集)을 하게 하였다. 그 책이 《법의대전(法義大全)》, 《백일소(白日蕭)》, 《심적편(心迹篇)》 등 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은 후일 “그 책들로 말하면 일시적 발심조흥(發心助興)은 될지언정 사람들을 지도하는 정식 교과서는 못될 것”이라는 소태산 대종사의 뜻에 따라 소각되었다. 팔산 대봉도는 원기 2년 (음) 7월 최초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 때에 태방(兌方)단원으로 임명되었다. 팔산 대봉도는 방언공사 당시에 키가 크고 건강한 몸으로 8인 단원 중 으뜸가는 기력을 가졌고 가정 형편도 제일 넉넉한 편이어서 정신․육신․물질 삼방면으로 솔선수범하였다. 어느 때에는 제방에 뚫린 구멍으로 바닷물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막으려고 애를 태우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인력으로 저 구멍을 막지 못한다면 내 육신으로 막겠노라’하고 사지(死地)를 평지(平地)같이 뛰어들어 막았다. 팔산 대봉도는 방언공사를 마친 후 법인기도에 동참, 법인성사를 이루고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 받은 법명이 광선(光旋), 법호는 팔산(八山)이며 본명은 성섭(成燮)이다. 이어 원기 8년까지 방언답을 관리하며 영산성지의 일을 돌보면서 공사에 힘쓰던 중 당시 소태산 대종사와 백학명 선사의 뜻에 따라 정읍 내장사에 가서 잠시 머문 것이 본격적인 출가수도가 되었다. 원기 9년 46세에는 이리 송학리 박원석의 집에서 사산 오창건·도산 이동안 등과 더불어 농사를 지었고, 익산총부 건설 당시 엿 장사 등을 하였으며, 원기 10년에는 농업부의 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원기 17년에는 마령교당 교무로 부임하여 창설초의 빈한한 교당이라 유지대책이 없었다. 팔산 대봉도는 부임하여 주경야독으로 바로 교리훈련을 시키는 한편 친히 전답개간, 수박재배, 과수원 경영 등에 노력을 기울여 근무 3년 만에 논 4두락을 매입하여 마령교당의 토대를 세우는가 하면 선진농법을 지역사회에 전했다. 팔산 대봉도는 원기 22년 4월, 59세시에 우연히 소화불량증으로 건강이 좋지 못하여 부득이 원평교당 교무를 사임하고 익산총부로 귀관하여 잠시 휴양하며 치료에 전력하였다. 그해 8월 교단 정기간행물인 〈회보(會報)〉에 ‘학이불능(學而不能)’이라는 글을 발표, 스승인 소태산 대종사를 높이 찬양하였다. 학이불능의 내용은 팔산 대봉도가 옛날 증자의 문하생인 공명선의 배움의 태도에 관한 《소학(小學)》의 일절을 인용한 후 소태산 대종사의 위대한 점을 ① 순일하신 공심 ② 일관하신 성의 ③ 위대하신 포용력 등 3가지로 요약하였다. 원기 23년, 60세시에는 총부 순교무로 임명을 받아 각지를 순회하다 영산교당에 내려갔다. 그러나 7월부터 병이 재발하여 그곳 동지들과 가족들이 온갖 정성을 다 바쳐 노력하였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원기 24년 2월 21일, 영산교당에서 61세로 열반하였다. 중앙총부에서 팔산 대봉도의 열반 소식을 접한 소태산 대종사는 눈물을 보이며 비통해 하는 가운데 대각전에서 열반식을 거행케 한 후 법상에 올라 팔산 대봉도의 영혼천도를 위하여 ‘생사거래와 업보멸도’란 내용의 법문(〈대종경〉 천도품 28장)을 설했다. <2004,원불교기초이해>

사산 오창건 (四山 吳昌建, 1889~1953)
사산 오창건 (四山 吳昌建, 1889~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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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오창건 종사 (四山 吳昌建, 1889~1953) 복원연도 : 원기 111년(2026) 복원기관 : 원불교기록관리소 복원자 : 이산 고대진 소장 원본코드 : WT1030151-000_018 인물정보 : 소태산 대종사 구인제자 중 한사람 소태산 대종사의 최초 9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사산 오창건(四山 吳昌建) 대봉도는 교단 창업기 공심의 표준적 인물이었다. 방언공사 중 흙을 져 나르고 떼 짐을 지는 등 고된 일로 힘이 들어도 소태산 대종사가 “자 시작하자”하면 맨 먼저 일어나 다시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 사산 대봉도였다. 사산 대봉도는 공중사라면 자신의 신명을 아끼지 않았고 공금을 지극히 아끼었으며, 소태산 대종사의 경제적 보좌 역할을 한 혈심제자였다. 사산 대봉도는 1887년 10월 17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학산리에서 부친 오윤안(吳允安) 선생과 모친 김중풍(金中風) 여사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불교를 믿어 왔으며 특히 부친은 불심이 장하여 동네 근방에 있는 대절산에 초당을 지어 수양을 하기도 하였다. 사산 대봉도는 12세시에 한문사숙에 입학하여 4,5년간 수학하였고, 성년이 되어서는 약간의 전수받은 재산으로 가사에 전력하면서 당시 일대에 만연되어 오던 태을교(太乙敎)에 뜻을 두고 열심히 신봉하였다. 사산 대봉도는 일찍이 소태산 대종사와 십 여리 떨어진 마을에 살았으므로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소태산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자 팔산 김광선에게 소식을 듣고 스스로 찾아와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었다. 원기 2년 (음) 7월 소태산 대종사가 최초 남자 정수위단을 조직할 때에 사산 대봉도는 진방(震方)단원으로 임명되었으며, 공석 중이던 중앙단원의 대리임무도 맡아 절약절식, 금주단연, 주경야독으로 교단 초창의 기초사업에 혈심혈성을 기울였다. 원기 3년 32세시에는 방언공사와 옥녀봉 아래 구간도실 건축에 단원들과 힘을 합쳐 힘든 흙 지게를 기쁘게 졌다. 원기 4년에는 8인 단원들과 함께 창생을 위한 정성스런 기도로 마침내 백지혈인의 법인성사를 나투어 이때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봉수 받은 법명이 창건(昌建), 법호는 사산(四山)이며 본명은 재겸(在謙)이다. 사산 대봉도는 원기 4년 (음) 3월 소태산 대종사가 새 회상 창립의 준비를 위한 휴양처를 물색하기 위해 변산 월명암에 1차로가 10여 일 머물 때 모시고 갔으며, 그해 (음) 10월, 변산에 입산할 때에도 소태산 대종사를 모시고 가 정산종사와 함께 월명암 옆 쌍선봉(雙仙峰)에서 법인기도를 해제하였다. 소태산 대종사가 변산, 만덕산, 내장산 등을 다니는 때에는 항상 사산 대봉도가 멀고 험한 길을 막론하고 식량을 지고 다니며 시봉하였다. 사산 대봉도는 키가 크고 기골이 호걸다웠고 기력이 장하였으며, 모습이 소태산 대종사와 비슷하여 뒤에서 얼핏 보면 소태산 대종사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닮아 ‘작은 대종사’라고도 불리웠으며, 소태산 대종사의 의복이 몸에 맞아 물려받아 입기도 했다. 사산 대봉도는 천성이 쾌활 인자하고 다정다감하여 사람을 대함에 감화력이 풍부하였다. 그리하여 전무출신 남녀 동지들은 마치 세정을 잘 아는 어머니와 같이 따르고 심지어 여자동지들은 사산 대봉도를 ‘언니’라 부르며 국한 없이 따랐다. 사산 대봉도는 소태산 대종사를 가까이서 시봉하였기 때문에 소태산 대종사의 교중사(敎中事) 감독하는 것을 많이 보아 그 처사법을 따라 교중사 감독에 능하였다. 그중에서도 건축 감독을 많이 하여 지방교당을 건축할 때는 사산 대봉도가 주로 감독하였다. 특히 서울교당 건축 시에는 몸소 노동일을 하였으며, 초량교당 건축 시에는 폭풍우 속에서 밤을 세워가며 교당을 지켰다. 원기 18년에 사산 대봉도가 서울교당 건축위원으로 상경하였고, 얼마 후에는 소태산 대종사가 상경하였다. 서울교당 신축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소태산 대종사 서울교당 교무인 이완철에게 짐을 지고 서울역까지 가자하였다. 이완철이 “제가 지금 교당 수축관계로 십여 명의 인부를 부리고 있을뿐더러 교무의 위신상으로도 난처하나이다.”하니 소태산 대종사 그 짐을 사산 대봉도에게 지우시고 다녀왔다. 사산 대봉도는 한번 소태산 대종사께 바친 신심은 일호의 사심이 없었으며, 서있는 곳이 비록 진흙땅이라 하더라도 소태산 대종사를 뵈옵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오체투지로 엎드려 지극히 공손한 예를 올렸다. 소태산 대종사 열반 후 원기 33년에 사산 대봉도의 발기로 변산 석두암을 중수하고 어느 날 후배 동지들과 함께 찾았다. 봉래정사 어귀에 이르자 사산 대봉도가 “종사님! 종사님! 창건이가 왔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동행하던 후진들은 사산 대봉도를 통하여 자신들의 신성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사산 대봉도는 영산 서무부장, 총부 서무부장 등을 오래 맡아 초창기 어려운 교단 살림을 알뜰히 보살폈으며, 전주·원평교당 교무로 일선교화에도 참여하였고 총부 예감·감찰원장 등을 역임하는 등 28년간 총부, 영광, 원평 등지에서 교단창업에 헌신하였다. 공사를 위해 몸을 잊은 무서운 공심가요, 향내 나는 전무출신이었던 사산 대봉도는 원기 38년 1월 23일, 66세로 열반하였다.<2004,원불교기초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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